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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년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비우스 다리 전투 승리

1. 배경: 로마 제국의 분열과 콘스탄티누스의 부상4세기 초, 로마 제국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 속에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퇴위한 후, 로마는 네 명의 황제가 통치하는 사두정치 체제(Tetrarchy)를 운영했으나, 이는 오히려 권력 다툼을 초래했다. 306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I)는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의 사망 이후 군대의 지지를 받아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다른 경쟁자들과 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치열한 내전에 돌입했다.이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막센티우스(Maxentius)였다. 그는 로마를 중심으로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며, 콘스탄티누스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03년 -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기독교 박해

1.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로마 제국의 종교 정책3세기 후반, 로마 제국은 극심한 정치적, 군사적 혼란을 겪으며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가 즉위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행정, 군사, 경제 개혁을 단행했으며, 종교적으로도 전통적인 로마 종교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황제의 신성성을 강조하며, 황제 숭배(cult of the emperor)를 제국의 통합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는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교 신앙을 보호하는 한편, 유일신을 숭배하며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를 위협적인 요소로 간주했다. 3세기 후반까지 기독교는 급속히 확산되며 로마 사회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

284년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즉위와 로마 제국의 개혁

1.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즉위와 정치적 상황3세기 후반, 로마 제국은 극심한 혼란과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235년부터 시작된 ‘군인 황제 시대’(Crisis of the Third Century)는 50여 년 동안 무려 26명의 황제가 차례로 즉위하고 살해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잦은 황제 교체, 군대의 반란, 경제적 혼란,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속적인 침략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가 황제로 즉위하며 로마 제국의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존의 군사 중심 통치를 벗어나, 체계적인 개혁을 통해 제국을 재건하고자 했다. 그는 황제권을 강화하고, 행정 체제를 정비하며, 제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

270년 -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방어 정책 강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건설)

1.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로마 제국의 위기3세기 중반, 로마 제국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외부의 위협으로 인해 붕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시기는 흔히 ‘군인 황제 시대’(Crisis of the Third Century)로 불리며, 약 50년 동안 수많은 황제들이 암살당하거나 전장에서 사망하는 등 극심한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로마 제국은 내부적으로 군사 쿠데타와 경제적 혼란을 겪었으며, 외부적으로는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속적인 침략을 받았다.이러한 상황에서 270년,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생존을 위해 강력한 개혁과 방어 정책을 추진하며, 로마 역사상 가장 거대한 방어 시설 중 하나인 ‘아우렐리아누스 성벽’(Aurelian Walls) 건설..

260년 -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 페르시아군에 생포됨

1. 발레리아누스 황제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립3세기 중반, 로마 제국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외부의 위협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253년 로마 황제로 즉위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노력했지만, 제국의 불안정한 상황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동방의 강력한 라이벌,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d Persia)는 로마의 동부 영토를 위협하며 빈번한 침공을 감행하고 있었다.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Shapur I)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강력한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그는 260년경, 로마의 동부 영토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침공하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대규모 원정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로마군은 예상보다 ..

250년경 - 전 세계적 전염병 확산 (사이프리안 역병)과 로마의 위기

1. 사이프리안 역병의 발생과 확산250년경, 로마 제국은 대규모 전염병의 창궐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이 전염병은 후대에 ‘사이프리안 역병’(Plague of Cyprian)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름의 유래는 당시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성 사이프리안(St. Cyprian)이 이 전염병에 대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병의 증상을 상세히 기술하며 이를 신의 시험으로 해석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사이프리안 역병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천연두 또는 장티푸스와 유사한 증상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환자들은 지속적인 설사와 구토, 고열, 목과 눈의 염증, 그리고 전신 쇠약 등의 증상을 경험했으며, 심한 경우 신체 일부가 괴사하는 사례도 ..

235~284년 - 로마 제국의 군인 황제 시대와 혼란

1. 군인 황제 시대의 배경과 원인235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살해되면서 로마 제국은 극심한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군인 황제 시대(Crisis of the Third Century)’로 불리며,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하기 전까지 약 50년 동안 로마 제국이 지속적인 내전과 황제 교체, 외부의 침략, 경제적 붕괴로 시달린 시기였다.군인 황제 시대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불안정이었다. 2세기말부터 로마 군대는 황제 선출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는 황제가 정당한 계승이 아닌 군대의 지지를 기반으로 즉위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특히, 황제의 즉위와 생존은 군대의 충성에 달려 있었고, 군대는 더 높은..

224년 - 사산조 페르시아의 성립과 중동 지역의 변화

1. 사산조 페르시아의 탄생과 아르다시르 1세의 등장224년,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d Empire)는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는 기존의 파르티아(Parthian Empire, 혹은 아르사케스 왕조)의 몰락과 페르시아 지역에서 새로운 제국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티아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아르타바누스 4세(Artabanus IV)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페르시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했다. 그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를 국교로 지정하여 정치적, 종교적 정통성을 확보하고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하였다.사산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 시대보다 더욱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했다. 아르다시르 1세는 강력한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220년 - 중국 후한 멸망과 삼국 시대의 시작

1. 후한의 쇠퇴와 멸망의 배경후한(後漢, 25~220년)은 전한(前漢)의 멸망 이후 광무제(光武帝) 유수가 세운 왕조로, 200년 가까이 중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2세기 후반부터 왕조의 기틀이 약화되면서 정치적 혼란과 내란이 심화되었다. 황제권이 약화되고 환관(宦官)과 외척(外戚)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 부패가 심화되었고,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다.이러한 혼란 속에서 184년, 도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태평도(太平道)의 지도자 장각(張角)이 주도한 황건적의 난(黃巾賊之亂)이 발발했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후 각지에서 군벌들이 성장하여 후한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궁정 내부의 권력 다툼과 외척 및 환관들의 전횡이 지속되면서 후한은 더욱 쇠퇴해갔..

212년 - 카라칼라 칙령, 로마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 부여

1. 카라칼라 칙령의 배경로마 제국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제정(帝政)을 확립한 이후,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용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은 오랫동안 제한된 특권으로 남아 있었으며, 특정 계층에게만 부여되었다. 기원후 212년, 로마 황제 카라칼라는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을 발표하여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이 칙령은 단순한 법적 변화가 아니라, 로마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었다.카라칼라 황제의 시민권 확대 결정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로마 제국은 2세기 후반부터 내전과 국경 방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세금 수입의 증가와 군대의 충원 필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