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 –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유럽 질서의 변화
나폴레옹의 부상과 황제 즉위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며 급부상했다. 1799년 쿠데타를 통해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한 그는, 1802년 종신 통령이 되었고, 1804년 12월 2일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 피우스 7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자신의 머리에 황제관을 씌우는 장면은 프랑스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이는 교황보다 황제의 권위를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법률, 교육, 행정 개혁을 단행하며 프랑스를 근대 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1804년 제정된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과 전 세계 법 체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유럽 정복 전쟁과 나폴레옹 제국의 확장
황제 즉위 후 나폴레옹은 유럽을 정복하며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 강국으로 만들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며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정복하거나 영향력 아래 두면서 프랑스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해상에서는 영국이 강한 저항을 보였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해군의 넬슨 제독이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무찌르며 영국 본토 침공이 좌절되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1806년)**을 선포하여 영국 경제를 압박했지만, 오히려 프랑스 경제에도 타격을 주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스페인과 러시아에서의 저항이 심화되면서 나폴레옹의 제국은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러시아 원정과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대륙 봉쇄령 이탈을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60만 명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으나, 러시아군의 초토화 전술과 혹독한 겨울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보급 부족과 추위로 인해 철군을 결정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다.
이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연합군은 프랑스를 압박했고, 1814년 나폴레옹은 결국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1815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백일천하를 이끌었으며, 마지막으로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패배하며 완전히 몰락했다. 그는 최종적으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1821년 생을 마감했다.
나폴레옹 시대의 역사적 의의
나폴레옹은 유럽 질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정복 전쟁은 유럽 각국의 국민주의를 자극했고, 이후 19세기 중반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나폴레옹 법전은 현대 법 체계의 기초가 되었으며, 행정, 교육, 경제 시스템 개혁은 프랑스를 근대적인 국가로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유럽은 **빈 회의(1815년)**를 통해 전통적 왕정을 복원하려 했으나, 혁명과 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나폴레옹 시대는 단순한 정복의 시대를 넘어 근대 유럽의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낸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